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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은 막연했다, 의미만이 나를 붙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희망'이라는 말은 때로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내일이 올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현실에서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은 기대보다는 불신을 먼저 불러온다. 빅터 프랭클이 갇혀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런 희망조차 무력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고, 인간이기를 포기당한 상태로 겨우 존재했다. 누군가가 총을 쏘거나 때려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같이 굶기고 버림으로써 점점 말라가게 만드는 공간. 어떤 신념도, 원칙도, 내일도, 자유도 없는 그곳에서 프랭클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희망'을 붙들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희망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단단한 것, 바로 '의미'를 붙들었다고 말한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내가 지금 겪는 이 고통이 향하는 방향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그를 살게 했다. 누군가는 수용소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떠올렸고, 누군가는 언젠가 완성할 미완의 연구와 글을 위해 살아남고자 했다. 프랭클 자신은 "이 모든 것을 언젠가 기록하고, 사람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존엄을 지킬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하루를 견디고 다음 날을 버텼다. "살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말 그대로 누군가를 살게 한 문장이었다. '고통이 크다고 사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가 보이지 않을 때 무너지는 것이다.' 그가 증언한 이 삶의 원리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지금 겪는 어려움은 어떤 의미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그 안에서 어떤 대답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살 이유가 없는 순간, 인간은 조용히 무너진다”
수용소 안에서는 목숨을 앗아가는 게 총알이나 폭력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아무것도 붙들 것이 없는 상태'였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수많은 이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날카롭게 지켜본다. 처음에는 말이 줄고, 이어서 눈빛이 흐려지고, 매일 지급되는 최소한의 음식조차 거부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곧 조용히 사라졌다. 의사나 간수가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도 전에, 이미 그 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삶을 떠나보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삶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방식의 전환이 아니다. 삶에 매달릴 수 있는 아주 실질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삶이 나에게 무엇을 줄까'를 고민하며 산다. 그러나 프랭클은 삶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며, 나는 그 질문에 응답해야 할 잭임이 있다고 말한다. 고통이 찾아왔을 때, 외부가 내게 준 상처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지금 처한 이 상황이 나에게 어떤 태도를 요구하는지를 묻고, 그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순간부터 삶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나의 응답으로 다시 정의된다. 아우슈비츠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가진 빵 한 조각을 옆 사람과 나누었다. 그는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남든 그렇지 않든, 이미 '자유를 가진 인간'이었다. 프랭클이 말하는 자유는 물리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태도로 고통에 반응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 선택이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희망은 끝이 정해져 있을 때 붙들 수 있는 것이지만, 의미는 끝이 없어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방향이다. 그래서 의미는 고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 속에서만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 “삶을 바꾸는 건 상황이 아니라, 내가 붙든 방향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나에게 남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너무 자주 외부 상황 탓을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환경을, 사람 때문에 힘들면 상대를, 불안할 땐 사회를 탓했다. 하지만 프랭클은 말한다. 인간은 조건이 아니라 태도로 결정된다고.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내가 누구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그는 그것을 '최후의 인간적 자유'라고 불렀다. 프랭클은 자신을 수용소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자기 존재를 끝까지 지키려 한 한 명의 인간으로 설정했다. 그는 삶이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수용소라는 지옥 속에서도 자기만의 의미를 붙들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바로 그를 살게 했다. "우리는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이 말은 삶의 방식 그 자체다. 내가 정말 바꾸고 싶었던 건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마주하는 태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외부에 휘둘리는 내 감정과 생각을 붙들고, 내가 이 고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프랭클은 삶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증명해 보였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도 의미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의미가 있을 때에만 진짜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내가 버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방향을 향해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다. 프랭클이 몸소 보여준 그 삶의 방식은, 오늘을 버티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질문 하나를 남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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